구기자의 세상만사

생활 속의 예술, 미술과 더불어 살다간 회식황제 이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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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1-01-03 11:1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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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미술협회=구충모 기자] 소년 이두식(1947~2013)은 경북 영주태생으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산과 들 동네 마을에서 본 집 등이 그림의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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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두식이 살던 동네에는 미술학원은 물론 석고상도 없었다. 청년 이두식이 후한 점수로 서울예고를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이 정직했다는 평을 한 감독관은 김병기(1916~ ) 화백이었다.


호방한 성격에 독창적이었다는 그의 데생실력은 뛰어난 순수성과 재능이 배어있었다. 그의 부친은 영주에서 하나 뿐인 사진관을 운영했다. 1920년대 일본으로 건너 가 사진을 배운 부친 덕에 이두식은 흑백사진의 필름 위에 연필로 음영을 입히는 리터치 작업을 수도 없이 할 수 있었다.


필름에 연필을 살짝대면 눈동자가 반짝빤짝 살아나고 이목구비가 살아났다. 지금의 포토샵과 비슷한 기술을 이두식의 손 끝에서 예술이 되어 재탄생하는 순간들이었다.


서울예고의 입학 첫해 담임은 화가 문미애(1937~2004) 선생이었다. 김병기 화백으로부터는 미술사를 배웠고 김창열(1929~ ) 선생으로부터는 호된 데생공부를 배웠다.


당시 서울예고의 동기들이 조각가 박충흠, 동양화가 오용길 후배로 가수 송창식이 있다. 송창식과 친했던 이장희는 이미 스타였던 유명가수 송창식과 함께 미술학도 이두식에게 아현동 언덕 위 살림집 겸 공장을 얻어 주었다.


1970년대 삼각지 일대 화랑에 이른바 '수출화'로 이발관 그림이라 불리던 '명작의 모작' 유트릴로 시슬레 등등 일류 화가들의 모사품을 그리며 살았다. 그렇지만 이두식은 극장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조악한 손기술이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가수들의 앨범자켓, 영화의 아트 디렉터, 신문연재 소설의 삽화, 포스터 등은 그의 손을 거치면 작품이 되어 나왔다. 당시 미대입시를 준비하던 학생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1973년 광화문 새문안로 가는 길 육교의 남단, 옛 경기여고 길에서 문을 연 레코드가게 '올리버'는 화가 이두식의 단골가게였다. 이두식을 비롯한 송창식 이장희 소설가 최인호 영화감독 이장호 외 당시 가수 예술인들의 약속장소가 되었다.


청년 이두식은 후일 홍익대 교수가 되었고 홍대 학장 시절에는 미술계의 다양한 직책을 맡아 진정한 미술계의 일꾼으로 학자로 예술행정가로 살았다.


술 한상이면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시작으로 지석철의 '물레방아 도는 내력'에서 일명 '빠바리송'에 이르기까지 일필휘지로 호방했던 그의 화풍 처럼 몸짓을 포함한 퍼포먼스로 좌중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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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식의 고향 영주는 경상북도에서 피란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해 사는 곳이다. 그들이 북으로부터 가져 온 문화 중 냉면은 풍기와 함께 본격적인 대한민국 냉면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술 마신 뒤 흥에 취해 '물냉면순례'를 하던 생전의 이두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가 냉면을 찿는 것은 고향을 찿는 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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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식은 덩치도 컷지만 씀씀이도 큰 사람이었다. 재일본 화가 이우환의 가마쿠라 자택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당시 돈100만원을 들여 최고급 마쓰자카 와규(和牛)를 샀다. 식재료의 가치를 중히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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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때의 격식도 차렸다. 젖가락을 들고 입 안의 음식물을 넣고 이야기 하는 것 그릇을 소리내어 던지듯 놓는 것 등이다. 영주 고향의 집에는 수건 마다 가족의 이름을 적어 각자 자기 수건만 써야했다고 한다. 세상 속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자유인으로 살았던 이두식은 생활 속 거리두기를 일찍부터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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