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세상만사

고려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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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4-02-23 01:3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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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천년을 이어 온 신라, 고구려 백제 600년 왕조의 긴 수명은 한국사의 특이한 점이지만 길고 긴 왕조의 교체는 늘 요동치는 민심의 소요였다.다시말해 지방권력으로 부터의 민심이반이 요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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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신라 말기의 사회현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 나온다 나라의 곳곳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파탄지경이었다. 신라의 여왕 진성여왕는 지금의 강원도 원주에서 양길과 궁예, 전주에서 견훤의 반란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본래 도적을 토벌해야 할 군인의 신분이었던 견훤은 오히려 도적들을 규합하여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조정의 통치에 반발해 자체세력을 키웠던 그들은 호족이 되어 중앙권력의 교체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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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호족들은 토호가 되어 서로 싸우기도 연합하기도 지금의 정치권력 처럼 합종연횡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웠다. 원주의 호족이던 궁예는 양실을 복속시켰고 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부친 용건은 스스로 궁예의 수하로 들어갔다.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려와 함께 후삼국 시대는 궁예를 몰아낸 왕건의 승리로 936년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왕건은 선물을 넉넉하게 주고 스물아홉이나 되는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호족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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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 지금의 안동(당시 고창)에서는 견훤과 왕건이 직접 참여한 전투에서 불리했던 왕건을 도운 호족으로 훗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일화는 권력교체의 대사건은 지방 호족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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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권위와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는 경주가 수도이던 시절 송악 출신의 왕건이 수도를 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로 부터 들어온 풍수라는 것을 이용했다. 천년의 고도 경주도 기운도 때가 지나면 쇠할 것이란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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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가까이 기득권을 누렸던 진골과 6두품 지방 사람들은 이러한 골품 외 신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건국은 지방세력들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다.


개경이 도읍으로 천도 후에도 서울과 지방의 관계는 새롭게 설정되어 고려 특유의 본관제로 불교국가로 500년을 이어갔다. 이성계는 고려와 조선을 통털어 용맹했던 대장군이자 장수였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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