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세상만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제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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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11-23 18:5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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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난징대학상의 30만명 간도대학살 나치의 유대인학살 외 청나라의 태평천국내전(1850~1864) 프랑스혁명 인류의 역사 보다 전사를 이어 보면 세계사는 제국들의 전승과 해체를 반복해 가며 진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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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약 1500만명의 목숨을 전사자로 앗아갔다. 더 여파는 더 더욱 세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 독일이 패전국으로 해체되었고 체코 외 여러 신생독립국들이 생겨났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해체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이 독립국가로 태동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영토분쟁의 씨가 뿌려졌다.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청도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렀던 게르만족의 전성시대를 마감했고 러시아의 패배는 폴란드 핀란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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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은 제국주의 패권국들의 해체와 더불어 '평화를 위한 전쟁' 처럼 보였으나 실은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 되고야 말았다. 그 사이 일본은 제국주의의 망령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 역시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으로 400년간 또 다른 제국들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독일과 연대한ㄴ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러시아와 세르비아 연대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대공부부를 암살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연합정부의 꿈은 무산되고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늦게 된 식민제국 독일은 3국간섭으로 청나라를 도운 댓가로 칭다오를 차지했다. 영국유학을 하고 독일 군사문화를 배워 일본군의 개조를 꿈꾸었던 일본의 유학파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영국과 연합하여 칭다오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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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세운 칭다오의 맥주공장 칭다오맥주는 독일이 아닌 일본국 승전의 축배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대한제국의 황실은 뚜렸란 투쟁의 구심점을 세울 수 없었다. 약소국의 나라잃은 설움을 삼켜야 했던 것일까? 


1913년 미국을로 망명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한국의 105인 사건을 고발하는 '한국교회핍박'이라는 고발서적을 출간했다. 일본은 미리미리 한국의 지도급 인사 105인을 구속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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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세계전쟁이 멈추고 1919년 이듬해 1월 파리평화회의 의장국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가 기대를 모았다. 언더우드에게 영어를 배었던 김규식이 파리로 파견되고 프린스턴 총장을 지냈던 윌슨을 믿고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이승만이 대표가 되어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으나 불발되고 면담 조차 이루어 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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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부터 서재필과 함께 조국의 독립의지를 불태우며 필라델피아 거리의 행진 '코리아 대행진을 준비하던 때가 이 즈음이었다. 1919년 3월 김규식이 파리에서 고군분투하던 때 한반도 곳곳에서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한달 즈음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1919년 당시에 상해에는 중국 공산당이 인민공화국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현재 유적지에 임시정부의 탄생에 실질적 도움을 주었던 계기는 프랑스 조계에서 "국가적 이익 보다는 국가의 정체성이 더 우선한다'는 훈령을 내린 프랑스였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 기초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헌법정신과 가치에 기반해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법통을 프랑스가 대내외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프랑스가 지금까지 한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북한정권과는 수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시시하는 바가 적지 안ㄶ음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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