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세상만사

元나라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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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11-16 12:2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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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원종 때 제주의 주민 1만 2000명이 거주하고 있을 당시 1273년 원과 고려의 연합군은 제주에 군대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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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원과 고려의 연합군은 항쟁을 진압한 뒤 '탐라초토사'라는 관청을 만들어 몽골인들이 제주에 거주하는 근거를 만들었다. 元나라가 제주를 수탈하고 지배하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元은 제주를 남송과 일본을 공격할 군사적 요충지로 여기고 말을 기를 목장을 여러곳에 만들기 시작했다. 고려의 道나 郡에 해당하는 '아막'을 동아막, 서아막이라는 목마장을 설치해 몽골인의 城을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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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아막'에는 말뿐 아니라 소 당나귀 낙타 양 등도 방목해 키웠고 몽골인들의 전통가옥 게르에서 몽고인들은 번성해 갔다. 1295년 즈음 부터는 관리를 보내 말을 실어 보내고 경제적 지배와 함께 수탈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元이 제주를 직할지로 지배하면서 목장을 관리하던 '묵호'와 정권에서 밀려난 유배자 죄인 일반 주민과 군인 등이 제주에서 정착해 통혼하여 살면서 상대적으로 지배층으로 세력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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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제주의 묵호세력들을 압박하고 반원정책을 시행할 무렵 묵호들은 제주로 파견되어 오는 관리들을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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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했다. 원나라가 쇠퇴하고 중국의 강남지역을 기반으로 명이 들어서면서 고려는 원나라가 지배하던 제주를 지배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두려워 했다.  


明은 공민왕 21년(1372년) 관리를 보내 제주의 말을 실어가려고 했으나 제주의  묵호세력들은 이들의 대부분을 살해했다. 공민왕은 묵호세력의 토벌을 위해 최영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국에서 차출한 정예군 2만5600명과 전함 314척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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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이 고려의 정예군을 이끌고 제주의 묵호 세력을 토벌하는 동안 고려의 공민왕은 시해되고 10세의 어린 우왕이 즉위한 고려는 이후 명나라에 말 3만필을 바치는데 그 가운데 2만필이 제주의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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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우왕은 최영이 제주를 정벌하느라 고려의 정예군과 다수의 전함을 이끌고 개경을 비우는 바람에 공민왕이 시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성계가 조정의 명을 받아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고려는 멸망하고 4년만에 조선의 건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元의 간섭과 간접통치와 지배를 받는 동안 고려의 조정이 제주의 묵호세력 정벌을 고려의 멸망과 조선건국에 영향을 주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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