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에 정상 국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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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11-13 13:3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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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202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세월호 참사는 476명의 탑승객 중 304명이 사망한 대형참사였다.
2015년 유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고 특별조사위원회도 만들어졌으나 어이없는 대형참사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세월만 흘렀다.
2014년 4월 15일 청해진해운 소속의 세월호는 인천항에서 예정된 출항시간이 지연된 채 늦게 출발해 오전 7시경 진도해역으로 진입해 들어섰고 8시 50분경 단원고학생이 119전남소방본부에 선박침몰 사실을 최초 신고하였다.
오전 9시30분 경 사고현장에 도착한 목포해경 경비정은 자력으로 배에서 탈출한 승객과 선박직 승무원들만 구조하였고 11시경 KBS는 뉴스특보를 통해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라는 대형오보를 냈다.
그 시각 우왕좌왕하던 목포해경은 선내진입을 시도했으나 강한 조류를 실패하고 11시 30분경 세월호는 배의 앞부분 일부만 남기고 전복된 채 수면 아래로 침몰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전후 의혹과 허위보고 책임자들의 회피 실종자 희생자들에 대한 무차별식의 명예훼손 등 대형참사를 두고 무책임 무능했던 국가는 근본적인 의혹과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구조의 실패를 이유로 같은 해 해경의 해체를 선언하고 11월에 제정된 세월호 특별법에 의해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으나 2016년 9월 위원회는 강제종료되었다.
2016년 6월 참사 788일만에 인양작업이 시작되고 2017년 이듬해 3월 침몰했던 세월호가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선체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2기 특별조사위원회격인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화가 출범해 CCTV데이터 주작의혹을 제기했다.
대형여객선이 많은 승객들을 태운 채 침몰하는 동안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구출해 내지 못하고 참사 전후 수많은 의혹상황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과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최근 중앙일보의 특별기획으로 연재되고 있는 박근혜 회고록(3)편 上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증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누구보다 자신이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答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안이한 구조, '전원구조'라는 공영방송의 오보, 그리고 경호실이 막아섰던 정황 안보실장 경호실장 해경청장 그리고 7시간의 대통령의 무기력 등 이것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이태원 참사와 脈이 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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