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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 [기고] 우린 왜 ‘반지하’에 살게 됐을까?… 한국 ‘반지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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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8-05 11:2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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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기생충' 中)


-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공간과 계급의 벽 

-일제시대 ‘토막집’부터 도시 개발 속 밀려난 ‘달동네’까지


[기고=조항준 공인중개사] 한때 세기를 놀라게 했던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 특유의 예술성과 대중성은 세계의 뭇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개봉 2년이 지난 지금, 영화 기생충은 조금씩 잊혀 가는 듯하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인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기생충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거주 공간’에 대한 화두다. 이 영화는 사회적 계급에 따른 ‘거주 공간’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이가 차별인지 차이인지는 각 개인이 판단할 문제지만 필자는 이를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초호화 단독주택 vs 쪽방촌 반지하 방, ‘집’은 곧 ‘계급’


기생충은 우리가 드러내기 싫었던 거주의 현실을 극으로 드러냈다. 극 중 최상류층이 사는 한남동 단독주택과 극빈층이 사는 충정로 쪽방촌 반지하 방의 차이는 결코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서울 도심의 빽빽한 주택가에는 수많은 반지하 방이 있다. 반지하 방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이 ‘서민’에 속하며, 보통의 사회는 이들을 ‘하류’로 인식한다. 그럼, 이런 반지하 방은 국내에 어떻게 처음 생기게 됐을까? 필자와 함께 한번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토막집 ‘살기 위해 땅 속으로’


반지하의 역사는 역시 도시 빈민층의 발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도시 빈민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당시 근대화의 시작과 그 괘를 같이한다. 반지하의 역사를 처음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군산의 ‘근대역사박물관’이다. 군산은 한국의 도시발달에 있어 여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도시다. 박물관에 따르면, 이곳에서 발견된 반지하는 당시 토막집으로 불리면서 땅을 파고 가마니를 얹어 주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의 수탈로 인해 도시 인근으로 빈민촌이 형성됐고, 그들은 산등성이에 임시주거지를 만들어 살아갔다. 남자는 주로 막노동을, 여자들은 일본인 집의 식모와 미선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68년 121사태 이전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불완전한 토지 분배와 농어촌 지역에 대한 차별로 서울로 인구가 모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잘 묘사돼 있다. 빈민들은 서울 변두리 지역에 주거를 형성하게 된다. 다음은 조정래 소설 ‘한강’의 한 부분이다.


“서울변두리의 야산들이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꼼짝없이 몸을 파먹히듯 옥수동의 그 산동 이미 목부분까지 먹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야산은 유난히 너저분하고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산을 뒤덥다시피 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판잣집이 아니라 움막집들이었다.'


땅을 석 자 정도 깊이로 파내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움막집들은 누추할 수 밖에 없었다.


<소설 ‘한강’中, 조정래>


그런한 옥수동 금호동은 80년대 90년대를 거쳐 나의 대학 4년의 등하교의 배경이 되었다. 산과 집이 구분되지 않고 그런 계단을 매일 올라다닐 주민들의 수고가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소설은 당시의 반지하 움막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동네 통장이 새끼줄을 둘러 터를 잡아준 천두만의 움막. 연탄 하나 피울 돈 없는 그가 푸들푸들 떨며 움막 입구를 나오자 밤새 그의 움막 뒤로 새로 자리를 잡은 더 보잘것없는 움막들'


▲70년대의 반지하 - 반지하의 태동기 ‘창고에서 집으로’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는 한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군 복무기간의 연장과 중고교 과정에 교련교육의 포함된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전까지는 없었던 주택에 방어적 개념에서 ‘지하’라는 개념이 생긴다.


지하는 지상보다 지대가 낮아 당시 사용했던 연탄을 쌓아두는 창고 등으로 사용됐다. 이후 심각한 주거난을 해결하기 위해 80년대부터 주거용으로 사는 것이 합법화됐다.


특히 1977년 일어난 박흥숙 사건은 한국의 도시화 과정에서의 주거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간다.


참사가 벌어지기 전 박흥숙은 땅굴을 파고 있었는데 “집을 부수면 어디서 사냐”는 질문에 “땅을 파고 살아라”는 답을 했기 때문이다.


반지하의 흔적은 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에 계속 남게 된다. 이때 새로 건축되는 주택에는 일종의 벙커의 개념으로 반지하가 설치가 의무화된다. 하지만 이때의 반지하는 지금의 반지하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지금보다 깊고 지붕은 낮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시작된 반지하는 처음에는 임대차가 불법이었으나 심각한 주택난으로 80년대 들어 합법화되고,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500만호 공급정책과 맞물려 반지하 없이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을 정도가 된다.


▲80년대 달동네의 등장 – 도시 빈민층의 집단 거주지역의 등장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사회에 달동네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런 ‘깔끄막‘에 어찌사냐는 어느 어머님의 말로 기억되는 가빠른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골목길과 지붕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달동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달동내도 도시빈민계층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저렴한 주거를 제공할 뿐만아니라 그 나름의 생계를 위한 네트웍의 기능을하며 삶을 위한 기반을 제공했다.


▲80년대 후반~현재 - 반지하 주거의 본격화


80년대 후반부터는 또 다른 반지하의 특징이 생긴다. 박흥숙의 집을 헐던 ‘땅을 파고 살아라’라는 철거반원의 말처럼 외형적으로 도시지역의 빈민촌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88올림픽의 성화봉송을 위해 반지하는 숨겨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었고 대통령의 눈에 보여서는 안되는 숨겨야 하는 공간이었다.


이 시기 도시의 빈민들은 달동네로 대표되던 그들의 집단 거주지에서도 해체당해 반지하로 흡수된다. 자신의 집을 침탈당해 땅으로 숨어드는 벌레들처럼. 당시에는 88올림픽이 한창이었고, 각종 도시 정비 사업으로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도시의 빈민들 강제철거에 처했고,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이에 선택의 폭이 좁은 도시 빈민들을 위한 달동네조차 쫓겨 반지하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반지하는 도시 빈민 생존을 위한 ‘투쟁의 흔적’이다


이처럼 반지하는 한국의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의 패배와 승리를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간적으로 어떻게 나눠지는가를 보여준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상전벽해의 시간이었다면, 가지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좌절이었다. 박흥숙 사건에서 ‘불’을 빼달라던 그들이 가장 두러워 했던 일이 2021년 우리의 삶에서 현실로 만들어지지 않으란 법이 있을까.


도시 폭동, 그러한 폭력적인 폭발을 막기 위한 정책이 절실하다. 쌓인 불만과 지친 마음은 폭력과 분노로 표출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이제 우리는 땅으로 숨어버린, 그래서 언젠가 터져 나올지 모를 도시 빈민 문제를 논의하고 그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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